얼마 전에 친구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녀가 아프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습니다.
대장암으로 수술을 했었고,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었지만
건강하게 치료를 잘 받고 있는 줄 알았었는데..
현대는 5명에 1명은 걸린다는 암이고,
또 암이라고 해도 몇년씩 건강하게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도 많으니
그녀의 무소식이 잘살고 있다는
희소식이라 믿었었죠.
갑자기 듣게 된 그녀의 장례식 소식에 맨붕이 왔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떠날 줄 알았다면
시간을 내서라도 그녀를 만나러 갔을 텐데..
페이스북 중계로 그녀의 장례식을 봤고,
그녀의 장례식에 온 많은 사람들을 보고,
또 그녀의 마지막을 그녀의 언니가 옆에서 지켰다고 해서
그녀가 외롭지 않게 하늘로 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불편했던 내 마음은 조금 더 나아졌었죠.
나는 갑자기 듣게 된 그녀의 죽음이라
그녀의 마지막이 어땠는지는 모르는 상태.
단지 그녀의 언니가 8월말에 입국해서
그녀가 하늘나라로 갈 때까지 옆에서 함께 했다는 것 정도였죠.
그녀의 장례식을 치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그녀의 언니가
페이스북에 그녀에 관한 포스팅을 시작했습니다.
사진 속의 그녀는 내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동남아 출신임에도 키가 170이상이었던 그녀.
키도 크고 예쁘던 그녀였죠.
오스트리아의 장례식에서 나눠주는 작은 카드.
망자를 기억 하자는 의미로 오스트리아의 장례식에서는
망자의 사진과 이 세상에 살았던 날자 들이 기록된 작는 카드를 나눠줍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이루어진 그녀의 장례식이라
이런 카드를 만들어 장례식에 온 사람들에게 나눠줬던 듯싶습니다.
사진 속에는 그녀가 살았던 흔적
1972년 3월 21일~ 2020년 10월 13일.
시집와서는 내내 남편의 양아버지를 간병하는 일을 해서
사람들을 만나러 밖으로 나갈 시간도,
독일어 학원을 다닐 시간도 없던 그녀.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당시는 그나마 뇌졸증의 초기라
옆에서 보조만 해 주면 거동을 하셨던 분의 간병이라
하루 1시간 시간을 내서 독일어 학원을 다닐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의 양아버지의 상태는 악화가 되었고,
나중에는 와상환자가 된 분을 24시간 간병하느라
하루 한두시간을 내는 것이 힘들었던 그녀.
그렇게 오스트리아에 와서 간병만 하다가 하늘로 가버린 그녀.
그녀의 마지막은 그녀의 친언니와 함께 하다가
집에서 삶을 마감한 줄 알았었는데..
그녀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의 마지막을 보냈나 봅니다.
호스피스는 삶의 마지막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갈 수 있게 하는 시설이라고 해도
타국에서 혼자였으면 더 많이 외로웠을 것을!
그녀의 언니가 매일 그녀를 방문해서
동생이 외롭게 않게 옆에서 지켜주고 있었나 봅니다.
그녀가 33일을 보냈다는 호스피스 병동의 사진.
내가 근무하는 요양원의 시설과 비슷하지만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는 병원용 침대.
그리고 침대 옆으로 보이는 이동식 변기.
우리 요양원에도 이동이 힘든 어르신들의 침대 옆에
저녁이면 이동식 변기를 놔주는데,
그녀는 화장실 이동이 힘들 정도로 많이 아팠나 봅니다.
우리 요양원의 어르신들이 사용하시는 용도인 이동식 변기가
그녀의 방에 있는 걸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은 내가 상상한 모습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녀의 마지막 시기에 그녀의 언니와 찍은 사진 한 장.
그녀는 내가 아는 그녀가 아니었습니다.
살이 너무 빠져서 뼈만 앙상한 모습의 그녀.
손에도 뼈마디가 그대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이 사진을 보는데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녀가 이런 상태였다면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서 방문을 했을 텐데..
나는 그녀의 무소식을 여전히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는 희소식으로 생각했었죠.
그녀가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던 시기에
나에게 연락을 해왔더라면……
아니, 내가 그녀에게 안부 전화를 했었더라면
그녀가 호스피스 병동에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녀가 하늘나라로 가기 전에 얼굴이라도 봤을 텐데..
처음에는 그녀가 왜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고,
그 다음은 그녀에게 무심했던 나를 자책했습니다.
“친구”라며 이름만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사실 그녀는 내가 다시 오스트리아에 돌아온
2014년 이후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저 가끔 주고받는 연락으로
그녀가 다시 오스트리아에 돌아 왔고,
남편의 양아버지 24시간 간병인으로
입주해서 살면서 하게 되었다는 것도 들었었고!
그녀가 대장암 수술을 했었고,
나중에는 다른 장기로 전이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었죠.
그녀의 마지막을 내가 알았다고 해도
시간 내서 달려가는 정도의 방문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겠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내내 미안합니다.
그녀의 마지막을 알지 못해서 함께 해주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고 하니 남편이 했던 말.
“그녀의 친언니가 옆에서 항상 함께 하고 있으니
그녀도 당신에게 연락을 할 생각을 못했을 꺼야.”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삶의 마지막이니 자기 생각을 추스리는 시간도 필요하죠.
하지만 그녀에게 나는 이미 멀리 살고 있는 타인이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마음이 불편합니다.
나를 친구라고 느꼈다면
마음 편히 연락을 해 왔을 텐데..
나는 그녀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과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지금은 하늘에서 편히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을 친구.
우리가 친구라는 인연으로 만난 생이었는데..
너에게 소홀했었고 너의 마지막을 알지 못하고
또 함께 해주지 못한 나를 용서하길 바래.
우리 다음 세상에는 그저 가끔 연락하는 그런 타인 같은 친구가 아닌
서로의 삶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찐한 친구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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