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남 3녀중 셋째 딸.
위로 언니가 둘 있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죠.
위, 아래로 형제가 있는 “중간 아이” 지만,
실제로 저는 막내처럼 자랐습니다.
청소년기 엄마랑 떨어져 살 때는
두 언니가 엄마처럼 나를 돌봐 줬고,
심지어 청소년이 된 동생을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때를 밀어줄 정도로
저에게 두 언니는 엄마 같은 존재였죠.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남동생한테 애교를 떠는 누나입니다.
마치 오빠한테 애교 떠는 여동생처럼 말이죠.
부모는 똑 같은 사랑을 준다고 하지만
아이들의 느끼는 부모의 사랑은 제각각이고,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 형제로부터 여러 종류의 상처를 받는 다죠?
맏이는 맏이어서 부모의 기대를 져버리면 안될 거 같은 책임감에
동생들을 잘 돌봐야 하는 건 덤으로 해야 하는 일이죠.
둘째는 맏이에게 쏠려있는 부모의 사랑을 자기에게 돌리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도 있을 테고,
막내는 또 막내 대로 부모에게 받는 사랑과는 별개로
형제 사이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있겠죠.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서론이 기냐구요?
이론 상으로는
위로 언니 둘에, 아래로 남동생 하나를 둔 나도 마음속에 받은 상처투성이어야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나는 상처 하나 받지 않고 살았습니다.
엄마를 떠나 있어야 했던 청소년기에
엄마 대신에 나를 돌봐야 했던 언니들에게는 스트레스였는지 모르겠지만,
난 막내처럼 언니들의 돌봄을 받으면서 살았죠.
내 위로 두 언니는 연년생입니다.
모든 연년생이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큰 언니가 둘째 언니보다 작습니다.
둘째 언니가 우리 집에서 키도 크고, 예쁘고 눈에 띄는 존재였죠.
그런 둘째 언니를 아빠는 아주 예뻐라 하셨고,
“인텔리”라는 애칭으로 부르시곤 하셨죠.
똑똑 하기로 따지면 큰 언니가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더 똑똑했는데..
셋째 딸이지만 예쁘지도 않은 나에게 나에게 아빠가 자주 하셨던 말씀은..
“우리 선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을 누가 그랬어?”
어릴 때 집에서 별로 존재감 없는 중간에 낀 딸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빠의 이 말은 내 존재를 “보기도 아까운 우리 집 셋째 딸”로 만들어 주곤 했죠.
엄마한테 혼나서 훌쩍이며 울다가 아빠가 이 말을 하시면
대성 통곡을 하면서 울어 댔던 기억이 있습니다.
거의 막내처럼 항상 언니들에게 받고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내 기준에서 내가 줄 사람은 “남동생”뿐이죠.
언니들에게는 항상 받았으니 언니들은 나에게 주는 존재 들이고,
내가 줄 사람은 내 아래로 있는 남동생이라 생각했었죠.
언니들도 가끔은 위로가 필요하고,
가끔은 동생에게 받고 싶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언니들은 내 손윗사람이니 말이죠.
“내리 사랑”이라고 하니 언니들은 나를 사랑하고,
나는 언니들에게 받은 사랑을 동생에게 주는 거라 생각했었죠.
우연히 본 유튜브 영상이 그동안 내 생각 너머에 있던
큰 언니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 영상을 보고는 그동안 이해 못 한 큰 언니의 행동들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맏이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큰 언니는 맏이로서의 살아야 했던 치열한 삶이 있었고,
이제는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었나 봅니다.
큰 언니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을 세월이 지나서 만나게 됐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합창단을 지휘하셨던 분이었는데,
이미 중년이 된 언니를 만나서 그분이 하신 말씀은
언니의 기억에도 없는 추억이었다고 합니다.
“합창단 연습을 하고 있으면 네가 수줍게 손을 들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선생님, 저 동생들 밥 해줘서 지금 가야 해요.” 했었어.”
10살짜리 여자아이가 집에 밥을 하러 가야 한다니..
내가 10살때는 철부지였는데..
큰 언니는 이미 10살 때 장사 나간 엄마를 대신해서
동생들 밥을 챙겨야 하는 책임감을 안고 살았었네요.
유튜브에서 캡처
할 일을 정해주고 나간 부모를 대신해서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10살짜리 맏이.
동생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자기 밥은 먹지 못하고,
아이들이 밥을 먹나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맏이.
간식을 먹으라고 정해진 시간에
혹시라도 늦을 까봐 시계를 보고 또 보던 맏이.
부모가 없는 시간에 자신이 해야 할 일도 많고,
또 동생들이 사고 치면 거기에 대한 사고 수습까지 하는 너무 대견한 10살짜리 맏이.
자신이 한일에 대한 칭찬을 받고 싶었는데,
칭찬보다는 질책을 받아야 했던 맏이.
동생들이 잘못한 것도 다 몰아서 혼나야 했던 맏이.
성격이 별났던 울 엄마도 큰 언니가 집에 없을 때
일어난 일로도 큰 언니를 잡으셨죠.
우리 집에서 제일 수다스럽고 말로는 절대 안 지는 셋째 딸.
엄마 말에 꼬박꼬박 말대답을 해서는
하루 종일 엄마를 약 올려놓으면..
그 화를 저녁에 퇴근한 큰 언니에게 쏟아 부어서
하루 종일 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온 큰 언니는
뜬금없는 날벼락을 맞기도 했었죠.^^;
사실 저도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화내는 엄마가 하시는 말씀에 조목조목 따져서 대답을 하다 보니
그것이 엄마를 더 열 받게 했던 거죠. ㅠㅠ
부모에게도 형제들에게도 인정보다는 당연하게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인식에
칭찬보다는 질책과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웠던 맏이.
나보다는 가족을 더 챙기느라
자신이 원하는 건 마음속 저 깊이 감춰둔다는 맏이.
큰 언니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 봐주고
챙겨준 사람이 없어서 더 외로웠나봅니다.
평생을 함께 한 동생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맏이로 살아야 했던 큰언니.
“내가 맏이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던 큰언니.
나이가 들면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고 싶었지만,
여전히 동생들을 돌보고 보듬어야 했던 큰 언니.
중년이 된 지금에야 10살에 동생들 밥을 해줘야 했던
큰 언니의 그 작은 어깨를 생각합니다.
큰 언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당신의 그 힘든 삶을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베풀기만 강요 받았던 맏이로서의 삶을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는 그 맘 이해합니다.
누군가 함께 짊어질 수도 없는 맏이로
치열하게 살아준 그 세월에 박수를 보냅니다.
세상의 모든 맏이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동생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그 수고와 어려움,
스트레스를 나이 들어 이제야 보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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