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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각들

내 동료의 인생 이야기, 사랑 받지 못한 그녀

by 프라우지니 2019.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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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요양원에는 나랑 비슷한 외모를 가진 직원이 있습니다.

한국사람인 내가 나란히 서있으면 꼭 자매같이도 보이죠.

 

같은 아시아 사람이라도 해도 나랑 비슷한 외모라면 중국이나 일본쪽.

그녀의 라오스 출신인데..중국쪽 피가 섞여있나부다..했었죠.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실습생으로 요양원에 첫발을 디뎠던 5년 전.

그때 그녀는 배가 산만한 마흔이 넘은 임산부였죠.

 

그녀는 나에게 참 불친절한 직원이었지만..

독일어 서툰 외국인 실습생에게 거의 모든 직원들은 불친절했기에

“불친절한 인간들”중에 하나로 생각했던 직원이었죠.

 

그렇게 실습생 생활을 하는 동안 임신 8개월에 그녀는 출산휴가에 들어갔고,

아이를 낳고 1년 동안은 육아휴직를 가졌었죠.

 

내가 정직원이 되고 그녀가 육아휴직에서 돌아와도 그리 반가운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특히나 나의 독일어를 놀리는 듯한 행동을 한 후로는 더 싫었죠.^^;

 

그러다 그녀가 일과 육아에 지쳐 병원에 실려가는것도 봤습니다.

그녀가 좋아한다는 김치를 준적도 있었네요.^^;

 

그 일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를 클릭하시라~^^

http://jinny1970.tistory.com/2975

내 김치를 좋아해주는 내 동료

 

http://jinny1970.tistory.com/3018

오스트리아 워킹맘의 번아웃

 

가끔 휴식시간에 그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위로 오빠가 셋이 있는데, 오빠들이 입던 옷들을 물려받아 입어서 한 번도 여자 아이들이 입는 공주원피스나 예쁜 색의 옷을 입어보지 못했어.”

 

“40 대에 아이 넷을 데리고 유럽에 입성해서 열심히 사느라 힘든 경제생활 하다보면,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 예쁜 옷을 못 사 입힐수도 있겠지, 그것이 딸에게는 섭섭했던 모양이다!”

 

뭐 그렇게만 생각했었습니다.

나도 위로 언니 둘을 두고 있어서 언니들 옷을 물려 입으면서 컸으니 말이죠.

 

오늘 조금 한가한 오후에 그녀와 잠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녀가 일과 육아, 그리도 하나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남편 이야기는 알고 있고!

그때 그녀가 얼마나 “시어머니”를 싫어하는지도 알았었죠.

 

외국인(적어도 외모는) 며느리를 절대 반가워하지 않았다는 시어머니였고,

지금도 시어머니와는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그녀!

 

 

https://pixabay.com/images/search/eltern/에서 캡처

 

이야기 중에 그녀의 부모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40대에 이곳에 왔는데, 40년을 넘게 살아도 아직도 독일어를 못해!”

“당신들이 젊으실 때는 돈 버시느라 바쁘셨을테니 독일어를 배우실 시간이 없으셨겠지.”

“그럼, 나중에 은퇴하고 시간이 남아돌 때 배워야지.”

“이미 살 만큼 사셨고, 또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자식들이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자식들이 다 도와주니 따로 배우실 필요를 못 느끼셨나 부지.”

“그렇게 도움이 필요할 때는 그렇게 아끼는 아들들을 시켜야지 왜 나한테 전화를 하냐고?”

“그거야 아들보다는 딸이 더 만만하니 그런 것이 아닐까?‘

 

나의 이 말에 콧방귀를 뀐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위로 오빠 셋이 있어. 우리 엄마는 아들들은 금이야 옥이야 필요하다는 거 다 해 주면서 딸인 나는 사랑하지도 않았고, 항상 차별했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하시면서!”

“원래 아들 셋에 막내딸이면 귀여움을 받지 않아?”

“울 엄마는 아들 셋이니 더 이상 필요 없는데 아빠가 딸을 원해서 낳은것이 나였지.”

“그래도 막내딸이면 너무 예뼜을거 같은데..”

“아빠는 당신이 원하는 딸이라 너무 사랑하셨는데, 엄마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

딸이 나는 집에서 청소나 하고 밥하는 거나 배우라고 하셨지.”

“그래도 딸인데 너무 한 거 아니야?”

“딸인 나를 자식 취급을 안 하니 옷도 안사준거겠지? 난 한 번도 공주 원피스를 입은 적이 없어. 항상 오빠들이 입던 옷들을 물려 입었고, 가지고 있던 치마라고는 검정색 하나였어.”

“....”

“울엄마는 나는 결혼도 하지 말고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서 당신들이 늙어가니 간병이나 하라고 하시더라.”

“뭐야? 딸이 식모야?”

“엄마는 나를 낳았다 뿐이지 엄마가 아니라니깐!”

“지금도 엄마랑 사이가 그래?”

“그렇지. 평생 나를 집에서 부리는 하인 취급하고, 나는 필요없는 존재라고 해놓고 당신들이 늙으니 시집도 가지말고 집에서 간병이나 하라고 해서 그 잘난 아들들한테 받으라고 했지.”

“그래서 오빠들이 엄마한테 잘해?”

“잘하겠지!”

“울엄마는 내가 28살 때 집을 나오는데 그러더라. ”네가 집나가서 잘될거 같냐고, 너는 절대 그러지 못할거라고 악담을 하더라. 울엄마는 내가 마투라(고졸/여기서는 나름 고학력)할때도 내가 요양보호사로 시작해서 주경야독으로 간호사 시험에 합격 했을 때도 “너 잘했다!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어.“

“무슨 엄마가 그래?”

“나를 낳았다 뿐이지 엄마도 아니라니깐! 글고 다 늙어서 나보고 간병을 하라고???”

“네 엄마는 왜 그러신거야,

아무리 아들이 귀해도 아들 셋이면 딸 하나쯤은 이뻐할만도 한데.”

“엄마에게는 딸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그저 집에서 부리는 식모 용도지.

나는 엄마한테 사랑받지 못해서 내 아이들에게는 사랑을 듬뿍주려고 해!“

 

이제야 이해되는것들이 있습니다.

이혼을 하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까봐, 아빠가 없는 틈을 느낄까봐 걱정했던 그녀.

 

평소에는 참 재수없는 행동에 눈에 거슬리기도 했었는데..오늘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참 불쌍한 인생이라는 생각에 대화 도중에 그녀를 꼭 안아줬습니다.

 

 

https://pixabay.com/images/search/hate/

 

나를 낳아준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학대와 차별을 받고 성장해서 이제 중년이 된 그녀.

아직도 그녀를 차별하는 그녀의 엄마!

 

이야기를 하다 보니 부모님이 라오스식 중국어를 쓰신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라오스 국경에서 살던 중국인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원래 유교문화에 “남아선호사상”이 있죠.

 

 

우리 집도 할아버지의 “아들타령”에 힘 입어서 딸 둘 낳고 “가족계획(수술)”을 실천하셨던 엄마는 수술했던 것을 풀고 낳은 것이 저였죠.

 

아들 이름까지 지어놓고 기다렸는데 나온 건 딸,

감사하게도 내 밑에는 남동생이 있죠.^^

 

아들을 원하는 집에 셋째딸로 태어났지만 난 그래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중에 아빠한테 제일 많이 듣고 자란 말.

 

“누가 우리 선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한테 그랬어?”

 

엄마한테 혼나고 저녁에 퇴근한 아빠 앞에서 입술을 실룩거리면서 서 있으면 아빠가 한 번에 알아보시고 하셨던 말씀.

 

이 말에 저는 항상 빵하고 터져서는 아빠 앞에서 엉엉 울곤 했었습니다.

 

울엄마도 그리 다정하신 스타일은 절대 아니셨지만, 그렇다고 “넌 왜 태어났니?”,"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집아이야!" 하신적은 없습니다.

 

셋째 딸이 내가 철없을 때 “나를 왜 낳았냐?”고 한 적은 있지만 말이죠.

 

물론 딸 셋에 아들 하나이다보니 차별을 조금 받기는 했습니다.

남동생한테만 돈을 주고, 남동생한테만 맛있는 것들을 더 많이 사주셨죠.

 

하지만 저 나름대로 이것도 잘 극복하고 살았었습니다.

남동생 손에 돈이 쥐어지면 꼬셔서 데리고 나가 같이 사먹었고,

남동생 손에 과자 봉지가 쥐어있으면 그것을 뺏어 먹는 노하우까지!

 

그래도 나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선도 안보고 데려 간다는 보기도 아까운 셋째딸”로 말이죠.

 

 

 

https://pixabay.com/images/search/eltern/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알았습니다.

 

내가 밷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하는 법인데..

그녀의 엄마는 자신이 낳은 딸에게 평생 차별과 악담만 일관했네요.

 

그녀는 대화의 말미에 자신은 스스로나 너무 자랑스럽다고 했습니다.

 

“나는 내가 마투라(고졸/대학입학시험)를 끝냈을 때 너무 자랑스러웠고, 또 내가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간호사 직업교육까지 받아서 간호사 시험에 합격했을 때도 너무 자랑스러웠어.”

 

평생 엄마의 차별과 저주성 말만 듣고 살아온 막내딸.

28살에 집을 나왔을 때도 자신이 자랑스러웠다고 했습니다.

 

“니가 (나가서 혼자 사는 것을)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지 두고 보자”

 

뒤통수에 들려오는 엄마의 말을 듣고 나온 딸은 자립해서 잘 살았고,

또 중학교 동창을 만나서 결혼도 했습니다.

 

마흔이 넘은 딸의 가슴속에 낙인처럼 찍혀있는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 딸”

그래서 자신의 딸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려고 노력한다는 그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랑도 대우도 받지 못하고 행복한 기억도 없었던 엄마와 살았던 집.

 

지금 그녀는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아이에게 자신이 받지 못한 사랑을 줄수 있어서 말이죠.

 

돈이 없어도 행복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을 주고 축복을 주죠.

 

내가 낳은 자식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버린 그녀의 엄마.

세상에 이런 엄마가 그녀의 엄마 하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동료인 그녀는 나름 건강하게 자신의 상처를 극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평생 치유될 수 있는 상처의 종류는 절대 아니죠.

 

하지만 누군가에게 말을 함으로서 그녀의 가슴에 맺혀있는 것들이 조금씩 풀려나갔으면 합니다. 그녀는 정말로 “불쌍하고 가슴아픈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갖고 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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